누구나 자부심을 갖고 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사람이 공부를 많이 했건, 못했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똑똑하건 그렇지 못하건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누구에게나 뒤지지 않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을 더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 그저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살아가는 형태에 따라 단지 일부분의 모습이 나타날 뿐이다.  자존심도 그러한 자부심의 외부적인 표현의 일종이다.

나는 이북에서 국민학교를 1학년 다녔음에도 피난 나와서 늦게 10살에 다시 국민학교 1학년에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그래도 공부는 잘한다는 소리를 계속 들어왔었는 데, 피난 나와서 (그것도 9살 때 꼬박 내발로 걸어서 잘 알려진 평안북도 영변에서부터 끊어진 한강인도교 밑의 부교를 통해서 노량진의 군용탱크 후퇴열차의 탱크바퀴 밑까지 장장 한달에 걸친 피난대열이었다.) 10살에 다시 1학년에 들어갔으니까 여러 가지가 껄끄러웠다.  물론 공부는 모두 배운 것들을 하는 것이었으니까 문제가 아니었고, 제일 어울리기 힘든 것이 유희과목이었다.  “나비야”를 부르며 춤을 추어야 하는 데 7-8살짜리와 10살짜리가 같이 어울리려니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웠다.  키는 껑충 크고 원래는 천방지축 장난꾸러기였는 데 어린 동급생들과 어울리다 보니 한 없이 수줍어지게 되었고, 선생님들도 겸연쩍으니까 웬만한 유희시간에는 나는 견학을 하도록 하여 세워 놓곤 했다.  담임선생님은 1학년에서 2학년 올라갈 때 월반시험을 보게 해서 나를 2학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3학년으로 올려 주셨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은 피난난리통에 나를 학교에 보내야 된다는 사실을 잊으셨었다.  일년을 아버님 날품팔이와 만화책을 받아다가 길거리에서 파느라고 주로 부산의 남부민동 산꼭대기 동네를 돌아다니는 데 따라다니다 보니 다른 아이들이 학교를 간다고 해서 가게 된 것이 서울에서 피난 내려온 청운국민학교 분교였다. 청운국민학교가 서울로 돌아가면서 부산에 남게 된 우리는 그곳의 남항국민학교라는 부산 영도의 제2송도 쪽에 있는 학교와 합치게 되었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은 공부를 하는 것보다는 집안을 꾸리는 일이 더 컸다.  물론 아버지도 어머니도 매일매일 열심히 노력은 하셨어도 맨손으로 나와 여동생 둘, 다섯 식구가 생면부지의 부산에서 살아나가는 데는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우리는 어려웠다. 지금은 7남매의 셋째이지만 그때는 막내였던 여동생은 돌이 채 안 지났었다. 그러니 우리 집은 더욱 힘들 수 밖에 없었다.  내가 5학년 때에는 또 여동생 정연이가 태어나서 여섯 식구가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피난 내려가서 영도섬의 대평동이라는 곳에 얻었던 단칸 셋방(아마 이 방은 그 전에 작은 아버지가 도와주신 분의 집으로 특별히 이야기해서 월세를 내지 않는 작은 아버님 아는 집이었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평동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면 지금은 그 유명한 자갈치시장이었다. 부산의 모든 경제활동은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갈치시장에서 군복을 물들여서 파는 사람들의 작업복을 받아서 어깨에 메고 다니며 팔아주는 작업복장사 일을 시작하셨다. 아버님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는 그 당시 막내, 돌도 안 지난 정연이를 보고 계시다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에게 정연이를 맡기고는 미군군수물자들이 들어오는 부산 제2부두로 막노동을 나가시곤 했다.  그러면 나는 정연이를 업고 나룻배를 타고 자갈치로 나가 엄마 젖을 얻어 먹이고 들어와서 저녁이 될 때까지 정연이를 보곤 했다. 한 여름 뙤약볕에 정연이를 업고 통통대는 나룻배를 타면 가엾은 듯이 나를 보고 정연이를 보며 측은 한 눈길을 보내주던 사람들의 표정과 마음은 60이 넘은 아직도 생생하다.

국민학교를 마칠 때까지 나는 두 가지의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하나는 가끔 어쩔 수 없이 어려워지면 어머니가 들려주시는 강낭가루 자루를 들고 좀 낫게 사는 국민학교 동기들 집을 찾아가서 친구들 어머니에게 강낭가루나 다른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여 얻어 오면서 너무나 어려서 얻게 된 많은 인생의 공부들이었다.  그 때 특히 많은 도움을 주시곤 했던 분은 이학근이라는 동기의 어머니였다.  학근이 한데는 아직도 그런 고마움을 표시해 본 일이 없다.  이북에서 어릴 때는 바짓가랭이가 하루도 성할 날이 없이 장난꾸러기이고 명랑했던 내 성격은 이때부터 무척 내성적으로, 또 뒤로 물러서서 지켜보는, 그리고 항상 조심성 있는 성격으로 변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나 만 어려운 것이 아니고 나보다 더 어렵고, 절박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알 게 되는 큰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것은 국민학교 3학년 어느 날이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다닐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고, 또 할 시간도 없었다. 그렇지만 국민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은 너무나 쉬웠다. 그래서 나는 항상 공부 잘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어디를 가나 2등은 했어도 1등한 기억은 교회에서 한 것 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다. 그 당시에는 교회는 구호물자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고, 특히 나에게는 가끔은 과자도 주고, 학용품도 주고 하여 매우 가고 싶은 곳이었다.  또한 내가 가면 세상에서 누구 하나 반갑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아도 교회반사선생님들은 나를 너무나도 아껴 주셨다.  공부 잘하고, 성경암송 너무 잘하고, 찬송가 너무 잘 부르고, 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성경암송대회를 하건 찬송경연대회를 하건 운동 빼놓고는 항상 일등이었다.  그때 나를 아껴 주시던 반사선생님들 중에는 교장을 하시던 이창화장로님이 생각난다.  그리고 내가 일등하면 항상 이등했던, 아니 가끔은 일등도 했던 나와 같은 학년의 여학생 김수자가 생각난다. 세상에서는 나는 무척 힘들고 자존심을 구기고 동정을 구해야 했지만 교회에만 오면 나는 가장 기를 펴고 모든 사람들이 반겨주는 살 만한 존재였다.  특히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걱정이 없고, 부자로 보였다.  그런 부자와 걱정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며 살게 되니 얼마나 다닐 만한 곳이었나.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궁금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이 새벽같이 교회로 와서 무엇을 하는 가를 알기 위해 새벽기도회라는 것을 참석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새벽에는 학교는 물론 집에서 애기를 보아야 하는 문제도 전연 없었다.

두 번째의 내 생애의 큰 깨달음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이루어 졌다.

새벽기도회는 새벽 4시반쯤부터 시작되는 것 같았다.  내가 5시쯤 가도 이미 기도를 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시작 때에는 캄캄하여 누가 왔는지, 얼마나 참석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점점 밝아오면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교회가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하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 게 되었다.  내가 놀란 것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일요일 낮에 교회에서 볼 때는 그렇게 환하고, 여유 있고, 모자람과 걱정이 없어 보이던 그 사람들이 그렇게 비통할 정도로 절박한 아픔과 문제들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분은 지금 짐작컨대는 암이겠지만 황달로 고통을 받고 있는 남편의 병을 낫게 해달라는 나와 동급생인 채창염의 어머니의 애절한 기도와 절규였다.  그 후에 채창염이의 아버님은 그 병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후로 나는 새벽기도회에 가서 내가 기도하기 보다는 남의 기도를 듣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잘 기도할 줄도 몰랐고, 또 옆 사람들의 절절한 기도내용을 들어 보니 내가 가진 고통이나 어려움은 기도할 내용도 못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것이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3년 이상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였다.  그 교회에서는 기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나가는 지는 몰랐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새벽기도회를 계속 나가면서 교회에 나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어려움과 그것을 극복하면서 세상을 잘 살아나가는 것을 일요일마다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나에게 다짐할 수가 있었다. 저 분도 그렇게 어려운데도 잘 헤치고 나가는 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라고.  그리고는 어린 마음에 이제부터는 무조건,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자고 3년여를 다짐했다.

나는 나의 국민학교 시절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짓고 또 그때 받은 내 생의 방향과 내용이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전부라고 생각한다.

 부산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집안의 내력이라든지 특별한 관계가 없으면 우선 경남중학교에 가게 되어 있었다나도 당연히 국민학교 선생님들의 지도에 의해 경남중학교에 들어갔고,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아침 등교 길에는 신문배달, 그리고 학교에서는 그 당시 월간 과학잡지의 학교 내 배달을 하게 되었다이 당시 나의 알바이트를 계속 관리해 주시는 선생님은 과학교사이신 허정철선생님 이셨다허정철과학선생님은 나의 탤런트를 높게 평가하셔서 나에게 많은 과학활동도 하도록 지도해 주셨다특히 당시에 열리는 전국과학전람회에 작품을 만들어 출품하도록 하여 매년 경남지역을 거쳐 서울 본 전람회에 출품하곤 하였다이때 서울에 작품을 전시하러 올 때는 당시 삼성그룹의 따님으로 허선생님의 형수이셨던 서울 명륜동 형님의 집에서 융숭하고도 깍듯한 대접을 받곤 했다이 당시 전시장에서 작품전시를 하면서 유사한 분야의 유사한 작품을 놓고 서로 관심을 가져 열띤 토론을 하고 알게 되어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던 부산MBC와 후에 서울 MBC개국 초기의 기술이사 최봉구선배였다당시는 나보다 2-3년 윗 학년의 부산공업고등학교 학생이셨다.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서울에서 대한민국을 휘두르며 브로커활동을 하시던 작은 아버님이 집에 오셨다학비는 물론 하루 세끼 먹을 것도 없는 실정을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 “네가 공부를 정말 잘 한다면 서울에 있는 경기고등학교에 가서 붙기만 하면, 거기 다니는 학생들이 학비나 생활비가 없다면 학비는 물론 먹고 자는 비용을 대어 주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중학교에서 480명이 고등학교로 자동으로 월반하고 전국에서 타교생 60명을 공개 선발하는 때였다더욱이 내가 붙으면 작은 아버지도 도와 줄 수 있다고 하셨다나는 담임선생님과 허선생님에게 이런 사실을 말씀 드렸더니, “너는 충분히 붙을 수 있으니까 지원해도 된다.”고 하셨다.

경기고등학교 시험을 보기 위해 그때까지 철도경찰에서 이동경찰로 근무하시며 나를 이모저모로 뒷바라지 해 주시던 막내 작은 아버님의 안내를 받으며 청파동의 작은 아버님의 집으로 괴나리 봇짐을 싸 들고 갔다그 당시 작은 아버님은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살고 계셨다. 시험을 보러 올라 왔다고 하니까 무척 자상하고 융숭한 대접을 해 주셨다며칠 걸쳐서 시험이 끝나고 합격자 발표일이 되었다두 친척 누님 돌아가신 옥숙누님과 동화누님이 화동 경기고등학교의 합격자발표에 동행해 주셨다석차순으로 붙여놓은 벽보에 두 누님이 놀랍게도 나는 540명 합격자 명단의 최 상단 몇 명에 붙어있었다기쁜 마음으로 청파동 작은 집에 들어오자 마자 그날 저녁에 작은 아버님 내외의 부부싸움 소리가 들렸다“잘 있는 애를 왜 올라 오라고 해서….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 와서 부엌 위 반 다락 나의 방을 올라가 밥상책상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움과 아득한 실망을 어쩔 수가 없었다내가 그 동안 써오던 일기장이 갈기갈기 찢겨서 널려 있고, 책 보따리는 난장판으로 흐트러져 있었다이날 저녁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지 않고 밤새 울었다그리고 다음날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나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저녁에 마음을 다져 먹고 모든 마음의 정리를 하고 한강 인도교로 걸음을 향했다이 당시에는 한강 인도교에서 자살자가 흔히 있던 시절이다청파동에서 한강 인도교까지 가는 동안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씻고, 인도교에 도달하여 뛰어내리려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이런 저런 생각을 뒤돌아 보고 다시 눈물을 닦고를 한참 한 뒤 난간에 올라가려 하는 데 난간이 그렇게 높은 줄은 평소에 전연 생각하거나 느껴보지 못한 현실이었다난간을 뛰어 올라 갈려니 밑의 깊은 물이 보이고. 뛰어내릴 용기도 대단해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망서리다가 다음에 다시 와서 뛰어내리기로 마음먹고 눈물을 흠치며 청파동으로 돌아왔다부엌 다락방으로 올라와 촛불을 켜고 부엌칼과 가위를 갖다 놓고 밤새도록 자살을 생각했으나 결국은 실행하는 용기를 내지를 못했다그리고 며칠 후 다시 마음을 다져먹고 한강인도교로 갔다한참을 서성이며 뛰어내릴 용기를 내려 했으나 결국은 용기를 내지 못하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죽을 용기를 가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나악착같이 살아서 악착같이 남보다 나아지고 남들에게 베풀어 주는 내가 되자. 하나님은 아직 내가 살아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고등학교에서는 입학하자마자 국사를 담당하셨던 자상하신 박지수선생님이 나를 정신적으로 푸근하게 지원해 주셨다. 담임 선생님을 제껴 놓고 박지수선생님을 찾아가서 입주가정교사자리를 부탁 드렸다선생님은 여러 방면으로 물색하시어 홍제동에 있는 중견회사의 (최현진)전무님 댁의 국민학교 다니는 아들(최상국)을 연결해 주셨다. 저녁에 옷-책 보따리 하나를 뒤쳐 메고 서울 올라 온지 한달 만에 작은 아버지 집을 나와 홍제동으로 독립하게 되었다홍제동에서 나는 마치도 새로운 가족을 얻은 것처럼 1년을 자연스럽게 지냈다최현진전무님, 상국이 어머님, 상국, 홍국, 아주머니(귀홍이 어머니), 나에게 고마운 삶을 주셨음에 감사 드립니다.

내가 경기고등학교를 다닐 때 교장선생님은 참 훌륭하신 분이었다문교부 장관자리를 마다하고 경기고등학교 교장으로 오신 분 김원규교장선생님 이셨다그 당시 학생들이 도시락을 아침에 미리 까먹는 것이 유행이었는 데 점심시간도 담임선생님과 함께 모든 학생이 같이 도시락을 먹도록 했다그리고는 점심시간에는 교장선생님은 학교 구석구석을 돌으시며 점심수업이 잘 되고 있는 지를 살피시곤 했다. 나는 점심을 싸가지고 가지 못하기 때문에 점심시간에는 슬그머니 나와서 학교 본관과 실험동 사이의 뒤쪽에서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점심이 끝날 때쯤 교실로 들어가곤 했다그런데 어느 날은 교장선생님이 뒷구석을 돌으시다가 나를 발견하시고는 대뜸 “너는 왜 점심 시간에 도시락 안 먹고 미리 까 먹었어 ?”라며 야단을 치시며 담임선생님에게 야단을 치셨다그 이후로 담임선생님은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하나 얻어 한 술씩 얻어서 내 도시락을 만들어 점심 시간을 보내게 하곤 하셨다아마 몇 달은 그렇게 했던 것 같다마음이 편치 않아 다시 운동장 밖으로 점심시간에 도망을 나오기 시작 했는데 그 후에 나에게는 전연 문제를 삼지 않으셨다.

나는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교복을 한 벌 밖에 사 입어 본 적이 없이 검은 물들인 군 작업복을 입고 다녔다이것도 그 당시에는 꽤 많은 곳에서 유행이기도 하였다점심시간이나 또는 학교 정문을 드나들 때도 다른 학생들은 허용이 안되었으나 나는 암암리에 묵인되고 있었다아마 그것은 그 때 박지수선생님이 그렇게 조치를 해주신 것일 것이다참 고맙고 융통성 있는 처리였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가 나는 물론이지만 다른 친구들도 매우 호기심이 강한 시기였다이때 가장 호기심이 많아 열을 올리던 그룹이 특별활동반 물리반 사람들이었다생각나는 사람 중 대표적인 친구는 포항공대의 박수용교수다어느 때는 고등학교 뒤 별관의 물리실험실에서 방과후에 모여서 천체에서부터 종교, 사회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논쟁을 벌이는 데 밝을 때 시작해서 어두워서 컴컴해도 불을 켜러 가지를 못하고 열들을 올리고 있는 데 마침 순찰하시던 당직 선생님이 캄캄한 실험동 복도를 지나시다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실험실에서 들리니까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줄 아시고 들어오셔서 불을 활짝 켜시고 우리들을 보시고는 의아해 하시는 것이었다불 켤 여유도 없이 서로 열들을 올리는 토론을 하곤 했다그때 토론된 내용들은 매우 폭 넓고 깊은 것들이었다.

고등학교 때 제일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은 고등학교동기 정귀영이네로부터였다. 처음에 입주가정교사로 홍제동에서 1년을 보낸 후로는 고학년이라고 오래 있지를 못하고 몇 달씩 돌아다니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때 당장 입주가정교사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청계천쪽 다동에 있는 정귀영이네 집에 가서 자고 얻어먹고를 뻔질나게 하곤 했다. 측은하게 보아주시던 귀영이 어머님이나 또 귀영이 한테는 한번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 본일이 없다. 마음속으로는 너무나 고마움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를 모르지만 그것도 마음뿐이다.  또 한때는 남산동에 있는 아버님이  유명한 영문학자 최재서님이신 최승언이의 집에서도 몇 달 얹혀 지낸 고마운 일이 있다.  이런 저런 고마움을 한번도 제대로 갚기는커녕 고맙다는 말조차도 한번 못 전해 주고 살아가는 나 자신에 대해 참 한 스럽게 생각해 왔다.  혼자서 나 자신을 위로하기위해 시작한 것이 무조건 남을 돕자는 마음가짐과 실행노력 이었다.  처음에는 양노원을 돕다가 늙어서 스러져 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고아원을 도우며 미래를 향해 쑥쑥자라나는 새싹을 보는 것이 훨씬 긍정적인 보람을 느껴서 그 방향으로 생각을 굳히고 실행하느라 했는 데 이제는 그나마도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방향을 바꾸어야 할 상태이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

나는 인간은 능력을 개발하면 한이 없이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내 자신이 경험해 왔다.  처음은 내가 사관학교를 다닐 때였다.  나는 생도생활을 하는 4년간 기독생도회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했는 데 그 중에서 성가대원으로서 성가대를 따라 다니다가 4학년이 되어 기독생도회장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기독생도 성가대의 지휘를 맡게 된 것이다. 물론 4학년이 되기 전에도 성가대에서 성가를 하기위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부단한 노력을 했다.  대표적인 것은 밤에 당직을 서며 악보를 보고 큰 거울 앞에 서서 성가지휘를 직접하는 것을 한시간 이상씩 하곤했다.  또 평일에는 텅빈 기지교회에 들어가서 칠줄 모르는 전자올갠과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가며 음정과 악보 전체를 익히는 연습을 거의 하루도 걸르지 않고 했다. 일요일 아닌 평일에도 한주일에 하루는 꼭 사관학교에 들어와서 내가 연습한 것을 확인해 주고 또 성가곡을 택하면 전체를 반주로 연습해 주곤했던 서울음대 기악과를 졸업하신 조만식 선생님의 손녀딸 정애덕 선생은 참 고마운 분이었다.  나를 보고 "애기" 연습시키러 왔다며 꼬박 시골인 대방동의 공사로 매주 일요일은 물론 주중 하루를 더 아무 대가 없이 들어와 봉사를 해 주신 것은 참 고마운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성가대 지휘를 시작한 것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공대 전자과에 위탁교육을 나갔을 때는 답십리 신흥교회의 중고등부 성가대 지휘, 그리고 미국 유학가서는 뉴욕의  롱아일랜드 감리교회 성가대 지휘, 그러니까 1966년초부터 시작한 성가대 지휘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1982년까지 약 16년간을 성가대 지휘를 한 셈이다.  음악을 전공한 누구에 못지않게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여 했다.  특히 미국 롱아일랜드 감리교 성가대에는 줄리아드음대 재학생들도 끼어 있어서 처음에는 매우 신경을 썼었으나 결국은 모두 극복하고 넘어갔다.  한창 성가대를 지휘할 때에는 40-60여명의 성가대원들이 합창을 할 때 나는 지휘자로서 한사람, 한사람의 목소리 들을 구분할 수 있었고, 누가 소리를 제대로 내지 않고 적당히 때우는 지, 심지어 음을 틀리게 내는 것은 물론 소리를 적당히 내는 것도 찝어낼 수가 있었다.  그 때에는 지휘자는 합창단이건 관현악단이건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 악기 하나 하나의 소리와 상태를 환하게 구별하며 지휘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중학교 때에 피아노가 있고 나를 반겨주었던 부산 영도섬의 중학동기 전순경이네 집에 가면 피아노를 전공하신 순경이의 누나 진경씨가 나를 보고 피아노 앞에 세우고 노래를 시키곤 했던 것을 보면 내가 노래에 소질은 좀 있었던 갓 같다.  내가 지금도 나 자신에게 놀라운 것은 성가대 지휘를 맡았던 15-6년 동안은 비가오나 눈이 오나, 하루 한두시간 이상을 연습곡의 분석에서부터 발성연습, 지휘연습을 걸른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노력의 결과는 학교에서 전공을 한 누구에 지지 않고 성가대지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미국에서 돌아오면서는 아들 형국, 딸 형주를 열심히 가르치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모든 다른 활동을 중지하고 교회도 뒷전교인으로 조용히 참석했다가 돌아 오는 숨은 교인노릇을 하기로 하고 이제 그런지 25년 이상 음악과 동떨어져 지나는 동안 내가 철저한 음악의 문외한 음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창 지휘를 할 때는 새로 생기기 시작한 노래방 같은 곳을 가면 나는 노래에 관계 없이 번호만 택하고 전주가 나오면 가사만 보고 따라 부를 수가 있곤 했었다.  그러나 합창지휘를 떠난 지 25년이 지난 요즘 노래방을 친구들과 갔는 데 아는 게 하나도 없음은 물론 악보와 가사를 보고도 따라할 수가 없었다.  철저한 음치가 된 것이다.

1967년 공사15기로 임관하여 2년간의 짧은 기간 동안 공군 통신장교로 대전에서 근무했다.  이때는 공군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던 첨단 방공레이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는 공군통신전자학교의 레이다정비중대였다.  전파를 보내서 금속체에서 반사되는 것을 시간으로 측정하여 물체의 방향과 거리를 재는 레이다의 기본 원리는 인간의 눈, 귀와 그 역할이나 기능이 똑 같았다.  앞으로도 계속 같은 핵심이지만 문제는 어떻게 작은 전자파 덩어리를 보내서 되반사되어 돌아오는 소위말해서 신호를 받아서 분석해 주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때 레이다의 핵심기술의 원천이 전자파를 내는 電磁波源에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대전 통신전자학교 레이다정비중대에서의 2년간의 야전근무를 마친 후 민간대학 위탁교육을 받고 공사교관으로 보임되었다.  이때 나는 레이다정비중대에 근무하던 시절의 레이다에 대한 기본과 취약점을 이용한 레이다 기능을 마비시키는 장비인 레이다재머를 사관학교의 실험실에서 꿰어맞추기 시작했다.  마침 교관중에는 인하대 전자과를 나온 사람이 한사람 있어서 같이 취미활동을 겸한 전자전재머 제작을 시도할 수 있었다.  지금 같으면 반도체 장치로 손바닥 크기면 될 것을 그 당시는 진공관을 이용해서 크기가 1입방미터 정도는 되고 그 장치에 공급해야하는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공사교관 중에는 성격은 좀 특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 했지만 새로운 것이나 분명하게 앞서 갈 수 있다는 판단이 서면 불 같이 밀어 붙여주는 원로교수가 한분 계셨었다.  나에게도 교관이셨고, 사관학교에 내가 교관으로 가서는 학과장, 부장이셨던 3기사관 양혁재 교수셨다.  드디어는 실험실에서 만든 방해전파 발생장치를 실제 레이다에 실험하자는 의견을 받아 주셨고 공군에서는 속으로 "피식"웃으며 우리나라 서해의 의상봉에 설치된 최첨단 레이다를 선뜻 허락해 주었다.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주어 나는 헬리콥터의 문을 열고 내가 만든 장비를 엉거주춤하게 끌어 안고 의상봉을 향해 비행하여 의상봉 레이다싸이트 20여마일 지점에서부터 신호를 발사했다.  결과는

공군의 최첨단, 미국의 최신 레이다가 스콥화면이 허옇게 재밍되어 기능이 마비 되었다.

이것은 공군이나, 특히 방공망을 관장하던 작전계통에서는 깜짝 놀랄 일이었고, 소란이 벌어졌다.  미국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했다가 그런 일이 벌어지자 부랴부랴 확인해 오기 시작하고 간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실험결과는 일년에 한번씩 사관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하는 대통령에게 자랑스럽게 보고가 되었고 박정희대통령은 이렇게 중요한 비밀사업은 ADD가 하여야 한다고 그리로 이관을 지시하여 몽땅 넘겨주게 되었다.   나도 같이 갈 생각이 있으면 ADD로 가라고 하였으나 나는 ADD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 사관학교에 남겠다고 하여 사업만 ADD로 넘겼다.  그 후 ADD는 꾸준히 레이다방해장비인 전자전재머를 개발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해 레이다재밍용 전자전장비 개발사업은 문제사업이 되었다.

이렇게 ADD 주도로 10여년 이상 개발이 지연되어 막대한 예산과 시간을 낭비한 말썽사업이 된 항공기탑재용 전자전장비사업은 전문가에 의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상부지시가 있게 되었다.  이 당시 전자전분야는 비밀사업분야라서 미국을 비롯하여 이렇다할 전문가를 찾을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상황에서 이 사업을 초기에 시작한 나에게 이 사업을 평가하여 향후 처리방향을 제시하라는 지시를 받고 ADD의 전자전 사업을 평가하게 되었다.  나는 면밀한 평가를 통하여 전자전은 국가적으로 독립성을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분야라는 것을 인식하고 계속 개발하여야 한다는 평가결과를 냈다.  그런데 그 평가결과를 가지고 전문가가 ADD의 관련 연구부서를 직접 관할하며 개발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나는 15년 여간 봉직했던 공사교수직을 떠나 율곡사업이라고 불리는 국가보위를 위한 사업을 주관하는 국방부 사업관리관실로 가서 문제사업을 관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군본부로 옮겨서 사업을 관리하려 하였으나 ADD를 원활하게 다룰 수가 없어서 국방부로 사업관리를 옮겨서 ADD의 관련 부서를 내 휘하에 넣도록 조치하였다.  그러한 방향은 오히려 그때까지 문제사업으로 골치아파하던 ADD소장이 제시해 주어 이루어졌다.

ADD의 소속요원 약 15명을 데리고 나는 사업관리자이면서 연구개발 책임자의 역할까지 하는 묘한 역할을 맡았다.

1987년부터 국방부 사업관리관실에서 전자전사업단장으로 재직하면서 그 동안 미국측이 Black Box로만 한국군에 공급하여 오던 전자전 장비를 국내기술의 미숙과 정보의 절대부족, 미국 동종업체의 방해, 그리고 미국업체의 영향력에 의한 미정부의 비 협조 등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ADD의 관련 부서를 직접 통활 관리하면서 성공적으로 개발하여 국내에서 양산할 수 있도록 하여 우리군의 전자전 능력의 자주화와 대미의존으로부터의 기술적인 독자성확보를 이룩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국가를 위해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매우 보람 있는 업적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이때 실제의 예가 미국은 전자전 장비를 우리가 개발을 시작하기 전에는 Korean Version이라고 하며 대당 1200만불에 판매를 허용한다고 했었다.  물론 돈을 미리 주고도 판매허가를 기다려야 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초시험을 완료할 때 쯤에는 그 가격이 600만불 정도로 하향조정되어 오퍼가 왔고 최종 우리장비가 현실화 되었을 때는 450만불까지 오퍼가격이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방산장비 한가지를 개발하여 그 소프트웨어를 조금씩 변경하여 코리안버젼, 이집션버젼 해가며 천차만별의 가격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내가 한국의 개발을 포기할 듯한 태도를 보여주며 미국의 장비에 대한 기술적인 내용과 미국의 신장비개발현황을 당시 미국장비 주개발업체인 레이티온과 미 국방성을 수도없이 드나들며 확인하여 이루어 냈다.  미국의 확인을 더 확실하게 확인하기위해 이스라엘, 불란서, 독일, 영국도 수차례 기술제휴를 운운하며 방문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사업을 맡고 2-3년, 몸으로 뛰며 선진국들을 수 없이 뛰어다닌 결과로 우리가 세계 최고의 전자전장비를 설계하며 만들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5년에 걸친 전자전장비 개발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여 시제생산으로 넘겨주고 흔히 비리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율곡사업인 전자전사업단장직을 마치고는 국방부에서 새로 설립한 국방정보체계연구소(후에 ADD가 흡수) 지휘체계연구부장으로 옮겨 한미연합작전지휘체계(TACCIMS) 공동개발의 한국측 사업단장을 맡아 개발사업을 수행하면서 그 기술을 한국군의 독자기술로 이전시키기 위해 한국군의 독자적인 전술지휘체계(C4I) 기본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하여 오늘의 지휘체계자동화 시스템구축의 기반을 마련한 후 28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민간에서의 폭 넓은 활동을 시작했다.

국방부에서의 전자전사업단장으로서의 성과를 인정받아 1995년부터는 당시 교통부장관(오명)과 신공항건설공단 이사장(후 교통부장관 강동석)으로부터 요청을 받아 대한민국 최대 Project중의 하나인 인천 신공항의 기획 및 건설기술자문, 공항의 핵심인 수하물처리시스템 업체선정평가 위원장, 공항의 신경인 공항종합정보시스템 업체선정평가 등 인천신공항 건설을 시작부터 공항개항까지 직.간접으로 깊이 관여함으로써 오늘 세계최상의 신공항이 탄생하게 된데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남다른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1995년 331일부로 28년간을 몸담아왔던 공군을 떠나 기술대우를 제창하며 그룹 중앙연구소로 설립한 고등기술연구원에 대우그룹전무직위를 받고 연구기획실장을 맡아 대우그룹의 R&D를 총괄관리하게 되었다고등기술연구원은 약 200여명의 석박사 인원으로 출발하여 석박사 연구원 약450명의 종합연구소로서 방위산업과 해양선박에서부터 자동차, 전자, 화학, 기계에 걸치는 전분야의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재정은 대우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연구과제를 제출하여 지원하는 형태로 활성화 하였다나는 연구기획실장(연구본부장)으로 그룹이 하고 있는 모든 분야의 생산과, 기업활동에서 미래의 첨단기술과 산업을 유기적으로 연계시키고 앞선 기술력으로 세계시장을 개척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계열사들이 되도록 기술경쟁력의 우위를 위한 R&D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특히 고등기술연구원에서 내가 새로운 분야를 접목시킨 것은 내가 과학기술부(당시 과학기술처)의 업무심사평가 및 자문위원으로 있으며 기획한 민·군 겸용기술의 접목이었다항공우주 분야와 기동장비를 묶어서 방산으로 특화 시켜 방산업체로서 생산에서부터 R&D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일관성 있게 하도록 주도 하였다.  해양, 기계, 자동차, 우주분야는 잘 정착되어 현재도 방산 지정업체로 활발한 방산분야 연구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방산분야는 거대한 복합체계로 구성되는 것이 통상의 경우이므로 세세한 기술은 물론이지만 하나의 복합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고등기술연구원에서 방산분야를 활성화 시키고 확고한 방향설정을 위해서 재임하고 있는 기간 동안에 고등기술연구원에 시스템공학의 석박사과정을 아주대학과 연계하여 세계최초로 개설하여 현재 운영되고 있다이 당시 MIT Sloan School교수진이 고등기술연구원을 방문하여 고등기술연구원의 시스템공학과를 모델로 하고 학과의 공동개발을 추진하기로 하고 1년 후에는 MIT에도 같은 과정을 개설하여 MIT는 현재 시스템공학 스쿨이 설립, 운영되어 고등기술연구원보다 훨씬 발전하여 확고한 자리를 굳혔으나 고등기술연구원은 크게 발전하지는 못한 상태로 아주대학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형태로 운영이 되고 있다시스템공학의 확실한 방향 설정을 위해 나 자신도 아주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어 직접강의하며 시스템공학과의 토착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주대학교의 시스템공학과와 고등기술연구원의 결과에 의해 본인은 국내 유수의 사립전문대학인 유한대학에서 학장으로의 영입을 제의 받아 자리가 잡혔다고 생각한 고등기술연구원을 떠나 1999년 유한대학의 학장으로 부임하였다. 우리나라는 기술입국의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하여 2년제 전문학교에서 신기술을 젊은이 들에게 심어줄 큰 포부를 가지고 갔으나 20년 이상을 주인이 없는 형태의 학교로서 유명무실한 재단의 뒷받침으로 굳어진 학교분위기를 쇄신하기는 매우 어려웠다그래서 단임의 임기를 마치고 유한대학을 떠나서 평소에 생각하던 일들을 넓게, 깊게, 그리고 사심 없이 보아오며 부천산업진흥재단의 이사로서 중소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부천지역의 중소기업 들을 돕다가 그 중의 한 분야인 크리스탈발진기(Xtal Oscillator) 분야를 직접 생산, 관리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1995년부터는 과학기술부가 수행해 오고 있는 ERC/SRC(Engineering Research Center/Science Research Center)의 심사업무 평가위원으로써 기초 및 응용분야 국책연구소들의 업무평가와 지도를 해왔으며, 특히 국가지정연구실(NRL)은 초기에 아이디어를 제창하여 과학기술부가 받아들여서 기획위원으로써 기획에서 연구실 선정/평가까지 과학기술선도를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했다.

또한1995년부터는 국방정보화 정책자문위원으로 2009년 말까지 군 정보화를 위해 첨단 정보의 군 활용과 첨단 민간정보기술의 군적용을 위한 정책자문위원으로서의 각종 정책자문을 해왔으며 고정칼럼인 국방칼럼과 시론 등도 국방일보에 게재했다. 또한 부천지역의 지역신문 부천자치신문에 창간호부터 2011년 현재까지 자치칼럼을 집필하고 있다.

1991년부터는 국내에서 가장 큰 학회의 하나인 대한전자공학회에서 재무이사, 회원담당이사, 부회장, 감사를 역임하며 학회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제도개선과 학회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했다.

국가정책 면에서는 통상산업부와 과기처 공동작성의 신경제장기구상의 과학기술분과 전문위원, 국가경쟁력 강화기획단(총리실)민군겸용기술 실무기획위원, 총리실 산하 기초기술연구회 기획위원, 총리실의 정보화추진 자문위원, 국방부 정보화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국가정책에 참여하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