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능력은 초 과학적이다.

120명의 관현악단을 지휘하는 지휘자는 120명 한사람, 한사람의 악기소리와 현재 내고 있는 음의 상태를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또 300명의 합창을 지휘하는 지휘자는 300명의 합창단원 중 몇 번째의 누가 연습부족으로 틀린 음을 내는 지, 감기들린 소리를 내는지를 꼭 꼭 찝어낼 수 있다.

인간의 능력이 신비롭고 무한하다는 것은 세상에서 만나는 천재들은 뒤로 하고, 범인들 한테서도 각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의 많은 재능들을 보면서 느낄 수 있다.

나는 내 자신에게서 그러한 사실을 직접 체험으로 느껴왔고 최근에 들어서는 인간의 능력은 갈고 닦으면 초인적인, 초 과학적인, 신비의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해 왔다.  

그리고 꾸준히 갈고 닦은 초인적인 능력은 계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능력이 보통의 일반인과 같이 아니 나의 경우에는 일반인보다도 더 추락해 버린다는 것을 체험했다.

나는 약 15년간에 걸쳐 성가대를 지휘했었다. 물론 처음에는 뭣 모르고 그냥 열심히 성가대원을 하다가 사관학교 생도성가대를 지휘했고 나중에는 답십리에 있는 신흥교회의 학생성가대, 그리고 미국에 유학가서는 음악전공자가 꽤나 있는 미국 뉴욕의 로칼처치의 성가대를 5년간 지휘했다.

내가 중학교 때에는 노래를 잘 불렀다.  그 당시 피아노가 있는 집은 흔하지 않았지만 친구 중에서 꽤 부유하게 살던 전 순경이네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고 당시 고등학생이던 순경이의 누나(진경)는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다.  1958년 당시는 춥고 배고픈 시절이어서 어느 집에 가서 과자는 물론 뭔가 좀 얻어 먹을 것이 있으면 자주 놀러 가곤 할 때였다.  순경이 누나는 나만 보면 피아노 앞에 세우고 자기는 반주를 하고 나를 노래를 시키곤 했고 나도 즐겨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마 나한테 음악적인 재질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사관학교가 군대인지도 모르고 나는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공부시켜준다는 홍보나온 선배들의 말에 공대전자과 가려던 생각을 바꾸어 첨단기술군이라고 레이다를 들먹여가며 홍보하는 선배들의 말을 따라 공군사관학교에 갔다.  가입교 들어가서 연병장에 모아 놓고 초도 보급품이라는 것을 주는 데 모든 것이 군복이고 군대 내의, 군화, 군모여서 나는 깜짝 놀랐다.  여기가 군대인 모양이구나 하고.  더욱이 줄지어 이발소로 인솔해 가서 머리를 빡빡 깎이고 난 다음에는 나 자신이 얼마나 황당하고 놀랐던지.

사관학교에서 많은 것을 얻은 중에 하나는 종교적인 생각의 변화도 얻었다.  나는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한번도 빼지 않고 교회를 갔고, 더욱이 그 나이에 새벽기도는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다녔지만 세레는 사관학교 4학년때까지 받지 않았었다. 나 나름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앞에 부끄러움이 전연 없다고 자신할 때에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굳게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생도 4학년이 되어 기독생도회 회장을 맡아야 하는 데 회칙에 보면 "세례교인으로...."이 있었다. 기독생도들이나 담임목사님이나 내가 당연히 차기기독생도 회장이라고들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나는 목사님에게 가서 회장직을 못 맡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깜짝 놀라셨다.  그때 목사님이 현경협 목사님이라는 분인데 전역하신 후에 미국으로 가셔서 목회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현 목사님은 세례의 의미를 나에게 정정해 주셨다.  세례는 완전한 사람에게 상급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레를 받은 순간부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맹세라고.  세례를 받지 않고 믿는 것은 그러한 자신의 노력을 회피하려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에게는 별도로 세례를 주셨고, 그리고 나는 기독생도회를 맡게 되었다.  당시 기독생도회장은 생도성가대를 지휘하는 것이 관례였다. 성가대의 구성은 남자파트는 물론 사관생도들이고 여성대원은 사관학교 주변의 교회로부터 지원나오는 분들이었는 데 우리 때부터 이화여자대학교에 다니는 지방출신학생들을 신촌의 이화여대 기숙사에서 대방동의 사관학교로 모셔와서 성가대를 하고 하루 예배를 같이 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기독생도 회장이 하는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일요일 아침에 일찍 군대버스를 타고 신촌의 이대기숙사로 가서 여학생들을 모셔오는 것이었다.

물론 그동안 나는 계속 성가대를 했지만 성가대 지휘는 해본 일도 할 생각도 못했었다. 그래서 성가대를 맡기 한두달 전부터는 한 밤중에 불침번을 자청해서 서며 지휘연습을 현관에 있는 큰 거울 앞에서 막대기를 들고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하곤했다.

그렇게 악보보고 음악의 감정 이해하느라 뒷구석에서 하루에 한두시간, 그리고 저녁 자유시간에 빈교회에 가서 지휘연습 한두시간을 하고, 그리고 한 주일에 한번 꼴은 반주자에게 간청을 하여 사관학교 교회에 와서 지휘자인 나를 가르쳐 줄 것을 부탁했다.  그때의 반주자는 조만식 선생의 딸 조선부여사의 딸 정애덕씨였다.  조만식 선생의 외손녀딸이다.  그 후 그는 미국 LA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성격 좋았던 정 선생님은 나를 애기라고 불러가며 그간 내가 서툴게 피아노 앞에서 혼자 잡았던 음정을 바로 잡아주고 또 연습시킬 내용과 곡 전반에 대한 감정과 느낌의 토론 등을 거쳐 한주일을 연습시키고 지휘하곤 하는 1년 동안의 사관학교 성가대 지휘는 나에게 많은 음악적인 감각과 지휘감각을 넣어주었다.

서울대학을 다니며 답십리에 있는 신흥교회에서 중고등학교 성가대를 맡으면서 나는 중고등학생들의 음악적인 감각의 예민함과 수준높음에 무척 놀랐다.  중고등학교 성가대원들은 욧점 있게 설명해 주고 가사의 의미를 한번씩 되새겨주고 곡 전체가 의미하는 내용을 이야기 해 주고 각부서별 연습을 숙제로 주면 너무나도 잘 해내곤 했다.  중간 중간에 성인성가대의 지휘자가 일이 생겨서 빠질 경우에 성인성가대를 맡아 지휘해보곤 할 때마다 느낀 것은 중고등학생들이 모든 면에서 훨씬 잘 한다는 것이었다.  

개성이 강한 성인들일수록 성인성가대는 마치도 성악가들을 모아 놓고 합창을 시키면 비성악가의 합창단에 비해 합창으로서는 낙제점이 된다는 것과 같다.  특히 교회 성가대에 좀 이름 있는 성악가가 한두명 끼면 합창은 40명이건 400명이건 전체의 소리는 밖으로 나와도 개인의 소리는 듣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아야 하는 기본적인 원칙이 깨어져서 마치도 달리는 마차에 쇠꼬챙이를 땅바닥에 끌고가며 잡음을 내는 것과 같은 형상이 될 때가 대부분이다.

1969년부터 미국 유학을 갈 1977년 까지 8년간의 중고등부 성가대 지휘는 나에게 많은 음악공부를 하게 했다. 지금도 아쉬웠던 것은 그때 피아노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피아노 반주를 중고등학생이 맡아서 하여야 하기 때문에 총각인 내가 반주자에게 너무 사적인 것 까지 매달릴 수가 없어서 결국은 공식적인 연습과 성가발표외에는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 반주자도 두 어머니가 경쟁을 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재진이와 한양희가 있었는 데 재진이는 섬세한 반주를 했고 양희는 무게 있고 박력 있는 반주를 했다.  그래서 재진이를 계속 반주자로 같이 했다.  그 후 양희는 이민을 간 것으로 알고 있고, 재진이는 목사 사모가 되어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내가 합창에 대해 가장 민감하고 정교한 감성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 중고등학교 성가대를 맡은 지 4-5년이 지나서였다.  인원은 적게는 30명 정도에서 많게는 50명정도였으나 이 때는 나는 한사람 한사람의 목소리를 합창을 지휘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즉 누가 적당히 음을 내지 않고 있고, 누가 다른 소리를 내고, 또 누가 감기가 걸렸는 지를 한사람 한사람 씩 모두 구분해 낼 수가 있었다.  성가대 지휘를 맡고서부터는 가능한 모든 합창발표회는 찾아다니며 참석을 하곤 했는 데 그 곳에서 나는 내 자신의 합창에 대한 감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100명이건 300명이되는 합창단이건 간에 어느 한사람이 틀린 음은 물론 감기걸린 목소리나 다른 음색을 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관람석에 앉아서 그 사람을 구분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수백명의 대 단원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가 연주자 한사람 한사람을 찝어서 주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합창이나 오케스트라는 가장 중요한 것이 많은 사람이 소리를 내지만 전체의 소리는 하나로 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속에서도 지휘자는 한사람 한사람의 소리를 구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능력은 갈고 닦으면 닦을수록 한이 없이 발달시킬 수 있는 초능력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이라고 체험적으로 믿는다.  물론 소질이 있으면 더 빠르게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더디거나 미치지 못할 수 있을 것이다.

성악을 하는 사람은 의례 독창이나 이중창 또는 사중창을 하는 정도이고 대개는 독창으로 그 사람의 특징이 굳어진다.  악기를 하는 음악가도 마찬가지다.  유명한 성악가나 독주자들을 모아 놓고는 좋은 합창이나 오케스트라를 만들기가 어렵다.  개성들이 뚜렷해서 마치도 굵기와 색깔이 다른 줄들을 꼬아서 한 개의 고른 동아끈으로 만들기 어려운 현상에 부딪친다.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 하기를 자전거는 한번 배우면 언제든지 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넘어지지 않을 정도라는 것을 의미하지 자전거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 커부길 등을 항상 잘 다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계속 유지훈련(Keeping)을 하지 않으면 퇘화해 버린다.

내가 성가대를 지휘를 그만 둔 80년대 중반부터 노래방 기기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노래방에서는 두꺼운 가사책에서 자기가 아는 노래를 골라서 번호를 눌러서 자기가 아는 곡을 선정하곤 했는 데 나는 아는 노래에 상관 없이 아무번호나 눌러서 반주가 나오기 시작하면 그 번호의 가사책을 펴서 가사를 보며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대개의 가요나 가곡들은 곡이 흐르기 시작하면 그 음과 리듬을 예측할 수 있게 진행된다.  그래서 한두군데 만 얼렁뚱땅하면 따라 부를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노래까지도 다 부를줄 아느냐고 혀를 차곤 했다.

그러그러하면서 성가대와 거리를 둔지 15년 정도가 지나서 나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안 가던 노래방을 따라가서 가사책을 보며 아는 노래를 따라 부르려고 하는 데 음도, 박자도, 리듬도 그렇게 생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음치 같았다.  책을 아무리 뒤져도 이젠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곡이 없었다.  

그래서 음악에서는 인간의 능력은 개발하고 유지하는 데 따라 신의 경지에서 음치의 경지까지 같은 사람이 모두 거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체험으로 겪었다.

 

훈련에 의해 엄청난 능력의 개발이 가능하다는 경험은 또 다른 한 분야에서 체험했다.  

서른 살이 안되었던 초급 장교시절의 일이다.  나는 사관학교 4년동안 사격훈련에서 매우 낮은 점수를 받곤 했다. 사격에 소질이 전연 없는 것 같았다.  보통 커다란 타겟 용지에 공심원의 동그라미가 10점에서부터 0점까지 2점단위로 5개가 그려 있었는 데 나는 10발을 쏘면 10점짜리의 한가운데는 물론 타겟용지에 두서너발 들어가 맞아주면 잘 쏜 날이었다.  모두 땅바닥이나 하늘로 날아가곤 했다.

소위로 임관하여 첫 근무한 곳이 육군으로 말하면 논산훈련소와 같은 대전에 있던 공군기술교육단의 화기학교관으로 잠간 근무하게 되었다.  화기학 교관실은 공군에 입대하는 공군 장교를 훈련시켜서 임관시키는 곳이었다.  또한 이 화기학 교관실은 3개월에 한번 약 3000명이 넘는 공군기술교육단의 모든 장병의 사격훈련을 주관하는 곳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 그랬지만 그 당시에는 전 장병이 사격을 하면 1주일 후에는 칼빈과 45구경 권총의 탄피를 반납해야 했는 데 문제는 대부분의 장병들이 사격훈련에 참여하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하여 화기학교관실의 아는 사람들에게 사격을 한 것으로 그 당시 말로 "가라정리"를 해 달라고 하여 그렇게 해 주곤 했다.  그렇게 하고나면 대개 실탄이 한번 훈련에 2-3만발은 남고는 했는 데 탄피반납을 위해서는 이것을 소모해야 하는 데 그 당시 화기학 교관들은 부대훈련 다음주는 아예 도시락을 가지고 사격장으로 출근하여 "사격사역"을 하곤 했다.  

그 당시 같이 근무했던 간후 54기 김형춘 당시 소위와 51기 박대규 당시 중위가 생각난다.,

다른 사람들은 사격사역을 싫어했지만 나는 사격을 이때 무척 즐겨해서 도맡아서 탄피소모를 위한 사격을 했는 데 대개 칼빈소총 20정정도를 갖다 놓고 교대로 쏘는 데 한 2-3천발 쏘고 나면 검지손가락에 물집이 생긴다. 나는 이렇게 쏘며 총을 그냥 쏘지 않고 생도생활 때 하도 못했던 사격성적의 원인을 찾기위해 열심히 타겟을 향해 쏘곤했는 데 한 2만발 가까이를 쏘면서는 방아쇠 당기는 요령을 알게 되었다.  

그런 후부터는 정조준을 하면 총알은 거의 10점 과녁으로 쏘는 대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정조준하지 않고 허리 춤에서 그냥 쏘는 람보식의 사격을 하기 시작했는 데 그 정확도도 상상이상으로 높았다.  처음에 한두발 쏘면 그 다음번부터는 거의 만점 타겟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나는 피나는 연습이야말로 엄청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발전을 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체험의 공개적인 입증이 이루어지는 한 계기가 있었다.

늦은 봄날 오후 신병들의 사격훈련시간 이었다.  신병들이 사격훈련을 진행중인 데 저 앞의 타겟 뒤쪽을 종달새인지 할미새인지 다리가 날씬하며 깝짝깝짝 앉았다 날아 옮기며 사격하는 신병들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새가 한 마리 있었다.  나는 총을 들고 실탄을 한발 넣고 정조준을 하며 요리저리 뛰며 이동하는 새를 쫓다가 방아쇠를 당겼다.  타겟과 타겟사이을 이동하던 공중 2-3미터의 새가 맞아 떨어졌는 데 머리와 꼬리털만 남아 떨어졌다.  

나 자신도 나의 사격솜씨에 놀랐다.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인간의 능력은 초과학적이라는 것을 실감한다.